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20세기를 바꾼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통해, 인간과 과학, 윤리와 권력 사이의 충돌을 심도 있게 조명한다.
이 리뷰에서는 영화가 다룬 핵무기의 개발 과정과 그것이 남긴 윤리적 질문들에 집중해, 《오펜하이머》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고민을 던지는지 분석한다.
핵무기의 탄생, 과학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무엇인가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과학자이자 조직자로서 원자폭탄 개발을 이끈 과정과 그에 따른 내적 갈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바로 과학이 현실과 만났을 때 벌어지는 윤리적 문제다.
주인공 오펜하이머는 분명히 뛰어난 물리학자이며, 과학을 사랑한 학자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는 자신이 연구한 결과물이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파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영화는 이를 단순히 ‘죄책감’ 수준에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과학의 발전인가, 아니면 인류에 대한 배신인가?”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운드와 이미지의 중첩을 사용한다. 핵실험이 성공했을 때 폭음이 들리지 않고, 오히려 침묵과 함께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표정이 강조된다. 이는 기술적 성공이 인간적 실패일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강력한 장면이다.
과학은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공백과 무책임의 공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윤리적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는가?”
천재와 권력, 그리고 책임의 불균형
영화 후반부는 단순한 전기적 사실을 넘어, 오펜하이머가 핵개발 이후에 겪는 정치적 박해와 사회적 배척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특히 1954년 그의 보안 청문회는 영화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다. 이는 단순한 진실 공방이 아니라, 과학자와 국가 권력 사이의 권리와 책임을 다투는 상징적 장면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핵 개발에 성공한 뒤 점점 그로부터 배제되고, 결과적으로 ‘빨갱이’ 낙인을 받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때 핵심은, 그는 ‘핵을 만든 자’임에도, 그 파괴적 결과를 통제하거나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두 번째 윤리적 질문이 등장한다.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그것을 통제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오펜하이머는 스스로를 '사탄을 깨운 자'라 여기며 핵의 위력을 경고하지만, 이미 권력은 그의 손을 떠난 뒤였다. 과학자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그 시스템은 정치와 군사 권력에 의해 전유되었다.
놀란 감독은 인물의 감정을 ‘기억’과 ‘현재’라는 두 시간축을 교차 편집하면서 극대화한다. 청문회 장면은 오펜하이머의 과거 선택과 현재 결과를 연결하며, 책임의 무게가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모순을 드러낸다. 또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루이스 스트로스는 그런 정치적 권력의 민낯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과학자가 사회적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와 윤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영화는 강하게 환기시킨다. 오펜하이머가 당했던 마녀사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다. 기술의 책임 소재는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윤리 체계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던진다.
오펜하이머는 정말 후회했을까?
이 영화의 가장 묵직한 여운은 마지막 질문에 있다. “오펜하이머는 정말 후회했을까?”
단순한 반성이나 죄책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영화 전반에 흐른다. 그는 세계를 바꿨지만, 그 세계에 머물 수 없었다. 영화 속 대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인도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따온 문구는, 그의 심리를 대변한다.
그는 핵무기가 세상에 미칠 영향력을 너무도 정확히 예측했다. 냉전, 군비 경쟁, 그리고 파괴의 두려움. 그는 처음부터 이것이 단지 전쟁을 끝낼 도구가 아니라, 영원히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임을 알았고,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진짜 ‘공포’다.
놀란 감독은 이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킬리언 머피는 내면의 흔들림과 고요한 광기를 동시에 표현하며, 과학자이자 인간으로서의 오펜하이머를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만든다. 그의 시선과 말없는 침묵이 영화의 정서를 만든다.
《오펜하이머》는 단지 역사적 인물을 조명한 영화가 아니다. 그가 살았던 세계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후회의 감정보다 더 깊은, 통제할 수 없는 결과 앞의 무력감을 통해 우리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결론: 과학, 권력, 윤리의 교차로에서
《오펜하이머》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놀란의 연출, 머피의 연기, 그리고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이 영화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결정의 책임’을 묻고 있다.